[조이문학] 두유(豆乳) 이야기 ...이성수

3644.07.04 17:52 발행

[조이문학] 두유(豆乳) 이야기 ...이성수

조이시애틀뉴스 | 2022/03/11 22:34

교회 시니어반 회원이 병이 나면, 으레 두유를 사서 병문안을 가게 된다. 마시기가 좋고 영양가도 높기 때문이다. 두유도 그 종류가 많다. 그중에 두유 베지밀의 창업자 정재원(1917~2017)회장의 일대기를 조명해 본다.

그는 황해도에서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만 졸업하고 서울에 왔다.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면서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의학강습소(학원)의 급사자리를 얻어 취직을 하게 되었다. 소년은 급사(給仕)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등사기를 밀어서 강습소 학생들이 볼 강의교재를 만들어내야 했다. 등사기는 지금의 복사기의 원조로 시꺼먼 등사잉크를 손으로 직접 밀어가며 여러 장을 찍어 내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다고 자연스레 교재를 들여다봤죠. 의학용어라 어려워 옥편을 뒤져가면서 독학을 하다 보니 나도 한 번 도전해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때는 의대를 다니지 않아도 시험만으로도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거든요." 급사 때의 말이다. 그는 급사이면서 큰 꿈을 꾸었다, 주경야독으로 의사고시에 매달린 지 꼬박 2년, 그는 20세에 드디어 의사고시에 합격을 했다. 주변에선 국내 최연소의사라고 축하해 주었다.

시험에 합격한 해인 1937년 그는 서울 성모병원 의사가 되었다. 병원 생활은 평탄했지만 수십 년 뒤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였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아오른 갓난아기 환자가 입원한 것이다. 아이 엄마는 어렵게 낳은 아이라며 "제발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 계속 설사만 해요."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병원 차트엔 병명이 '소아 소화불량'이었는데, 의사들이 매달려 설사를 멎게 하려고 애썼지만 그 원인도 모른 채 아이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소화불량에 걸린 아이를 업고 꼬박 하루 반나절 걸려 찾아온 아기 엄마의 헌신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설사를 고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후에도 복부 팽만으로 병원을 찾은 적지 않은 신생아들이 설사만 하다가 끝내 죽어갔다. 의사로서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이이들은 피어보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죽어갔다. 어떤 의사도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 그게 당시 의술의 수준이었다.

의사가 된 청년은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고 끝없는 의문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설사의 원인을 알아 내 아이들을 언젠가는 고치고 말겠다는 다짐을 굳게 하였다. 당시 43세였던 그는 의사 초년병 시절에 접했던, 소화불량에 걸린 신생아들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의학 선진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가 가장 큰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시기"라고 회상했다.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학을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6남매의 가족이 있었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도 보장받고 있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수많은 신생아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의사로서의 불타는 사명감을 떨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영국 런던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 어린이 소화불량에 관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곧장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UC메디컬센터로 건너가 미국에도 신생아가 설사병으로 죽는 비슷한 증상이 있나 샅샅이 뒤져봤다.

1964년 그는 도서관에서 소아과 논문을 찾아 읽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유당불내증(乳糖不耐症·lactose intolerance)'에 관한 논문을 접했기 때문이다. 논문을 통해 드디어 20여 년간 지녀온 의문의 실마리가 풀렸다. 유당불내증은 우유나 모유(母乳)의 유당(乳糖)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아이가 우유나 모유를 소화하지 못해 결국 영양실조로 죽게 된 원인이 유당불내증 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유 대용식을 만드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끓여줬던 콩국이 떠올랐다. 실로 미국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급히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서울 명동에서 '정소아과'병원을 운영하며 아내와 함께 우유 대용식 개발에 매달렸다. 아내가 콩을 맷돌로 갈아 콩국을 만들면 그는 콩국의 영양이 충분한지 분석했다. 병원 지하실에 실험용 흰 쥐를 잔뜩 갖다 놓고 콩국을 먹인 쥐에게 유당불내증이 나타나는지를 실험했다. 이것을 보고 주변에선 "정소아과 원장이 미국에 다녀오더니 이상해졌다"고 수군댔다.

이렇게 3년 남짓 연구한 끝에 두유를 개발해 냈고 이것을 설사병에 걸린 신생아들에게 먹였다. 이것을 먹고는 병상의 아이들은 눈을 뜨면서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콩에는 필수영양소인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이 들어 있지만 유당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1967년에 콩으로 만든 우유인 두유를 발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최고로 기뻤던 순간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소아 소화불량을 고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설사병을 앓는 아이의 부모들 사이에서 '정소아과가 용하다'는 입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전국 각지에서 그를 찾아오는 어린이 환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환자들이 몰리자 두유 수요(需要)가 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부족함 없이 두유를 먹이기 위해 대량생산을 해야만 했다.

정재원은 1973년 소아과 병원을 그만두고 '정식품'이란 회사를 설립하여 두유 대량 생산을 하게 되었다. 이 두유가 바로 그 유명한 베지밀이다. 콩국이 식물성 우유라는 점에 착안해 식물(vegetable)과 우유(milk)의 영문명을 합쳐 '베지밀(Vegemil)'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두유인 이 베지밀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지밀을 먹고 부작용이 났거나 피해를 봤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시 56세였던 그는 다시 한 번 도전의 길에 접어들었다. "개인 병원만 운영하다 기업을 이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지요. 하지만 신생아들을 살리려면 창업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어요." 그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 했다.

그가 이러한 사명감을 갖고 만든 베지밀은 지금도 두유업계에서 부동의 1위를 달리며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창업 후부터 지금까지 만들어진 두유는 총 130억여 개다. 이를 나란히 세우면 서울~부산을 1,690차례 오갈 수 있다고 한다.

정재원 정식품 명예회장은 아내인 고(故)김금엽 여사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그는 서울 성모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던 시절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고아였다. 수녀원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뒤 가톨릭 계열인 성모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정재원 회장에게는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중매가 많이 들어왔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마음이 박꽃처럼 예뻤던' 아내 때문이었다. 공부하는 여성이 드물 때였지만, 그는 아내에게 유학을 권했다. 아내가 일본에서 간호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해인 1942년에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어 부부가 되었다.

정 명예회장은 "선 봐서 결혼했더라면 처갓집 눈치가 보여 40대에 유학도, 50대에 창업도 선뜻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고아 출신의 아내에게는 친정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두유를 개발한 아내는 정식품의 사업에서도 협조하여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그런 아내는 2004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정재원회장도 2017년 향년 100세로 타계했다.

나는 고소한 베지밀을 마시며 이 두유가 원인을 모르는 설사로 죽어가던 어린이를 살렸다는데 감명을 받았다.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솟아오른 신생아가 죽어가는 모습과 사명감에 불 탄 청년의사가 발명한 두유로 살아나는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면서 정재원 회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성수 (워싱턴주 페더럴웨이 거주)
수필가

서북미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