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가을도 깊어 추수감사절이 들어 있는 감사의 달 11월이 돌아 왔다. 오곡백과가 여물어 수확하는 풍요로운 계절이다. 식탁에 오르는 햅쌀밥 그리고 햇과일을 접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잊을 수 없다.
 

마트에서 여러 가지 과일을 팔고 있다. 과일 중 마치 우량아처럼 탐스럽게 생긴  한국산 배가 있다. 맛이 좋아 이곳 시애틀에서 인기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를 보니 배에 얽힌 과거의 기억들이 생각났다.
 

아버지께서 농업학교를 다니셨기 때문에 우리 집 근처 밭에 감, 눙금, 매실, 배, 앵두, 대추 등 여러 가지 과일 나무를 심으셨다. 그런데 과일이 익어가는 가을이면 까치 때문에 골치를 썩였다.
 

얼른 보기에는 까치가 깍! 깍! 하고 명랑하게 짖으면 그 날 반가운 소님이 온다고 하여 까치를 길조대접을 하고 있었는데 과수나무를 재배하는 나는 까치를 나쁜 새 취급을 하였다. 왜냐 하면 까치는 배를 비롯하여 각종 과일을 닥치는 대로 뿌리로 쪼아 농사를 망쳐 놓기 때문이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과일 몇 개만 쪼아 먹는 것이 아니라 온 과일을 전부 조금씩 파먹으니 까치가 잡아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과일 중에 배가 까치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왜냐하면 배는 다른 과일보다 물이 많아 조직이 연하고 특히 맛이 월등이 좋기 때문이다.
 
 
유교 가정에 태어난 나는 할아버지가 종손이라 4대 봉사(奉祀)를 하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경험을 많이 하였다. 유교식 제사는 음식을 진설하는 방법이 까다롭고 유벌 났다. 그냥 상에 음식을 차려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룰(rule)이 있어 그 룰을 지켜야 했다.
 

예를 들면 과일을 진설하는데 순서가 있었다. 그 순서는 곧 그 과일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이기도 했다. 그 순위는 조(棗 대추), 율(栗 밤), 이(梨 배), 시(柿 감), 사과.....인데 배는 3번째로 우리와 가까이 한지가 오래된 과일이다.

과일을 놓는데도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해서 붉은 색이 있는 과일(대추, 감)은 동쪽에, 흰색 과일(밤, 배)은 서쪽에 차려 놓아야 했다. 또 어동육서(魚東肉西)라 해서 생선은 동쪽에 놓고, 고기는 서쪽에 놓아야 했다.
 

한 가지 웃기는 것은 그 룰(rule)이 집안 마다 틀린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는 친정에서 생선을 서 쪽에 놓았는데 시집와 보니 반대로 동쪽에 놓는다고 말씀하셨다.
“할어버지! 음식을 그냥 놓고 지내지 뭘 까다롭게 순서와 자리를 정해 놓고 그래요? “라고 질문 하면 ”선조 때부터 대대로 그리 전해내려 오는 법도란다”하셨다.
                                                        
 
나는 어려서 제사를 다 지내고나서 제일 먼저 먹고 싶은 것이 배였다. 대추는 물기가 없어 싫고, 밤은 딱딱하고, 감은 너무 물컹하며 사과는 시어서 싫었다.
 

우리 집 장손인 나는 제사지내고 으래 배를 독차지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고 배 인 듯하다. 아버지가 농업학교에서 신고 배나무를 잘라 돌배나무에 접목한 배였다. 재래종 배는 맛이 별로였는데 신품종인 ‘신고 배’는 맛이 월등이 좋았다.
 

둥그스름하고 탐스럽게 생긴 배를 창칼로 껍질을 벗기면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물이 많았다. 그걸 한입 비어 입에 넣으면 달고 단 배의 풍미가 입 안 가득 차고 스르르 녹아 버린다. 다른 과일에서 맛 볼 수 없는 그 시원한 뒷맛은 긴 여운을 남겼다. 그리스 역사가 ‘호모’는 하도 맛이 좋아 배야 말로 신의 선물이라고 극찬했다.
 

이렇게 맛이 좋은 신고 배를 먹는 집은 동네에서 우리 집 뿐이었다. 그 맛에 반한 까치는 배가 익을 무렵 극성을 부렸다. 그래서 성가시지만 낮은 곳은 종이 봉지를 씌워서 피해를 모면하였다. 그런데 까치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배 도둑이었다. 달밤에 몰래 우리 배를 따다가 5일장에 내다 팔았다.

누가 따다가 팔더란 소문을 들었지만 보지 않은 이상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분부가 계셔서 그냥 두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가 의심했던 그 도둑은 아주 가난한 이웃이었다.
   
 
“배 썩은 것은 딸 주고, 밤 썩은 것은 며느리 준다.” 는 옛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어머니들이 딸만 위하고 아끼는 반면 며느리를 폄하는 이기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밤은 배에 비하여 훨씬 영양가가 높다. 그러나 배는 오래 두어도 썩지 않고 발효하므로 먹을 수 있어 딸에게 주지만, 밤은 오래두면 발효가 안 되고 부패하므로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먹을 수 없는 걸 고부간 갈등이 있는 며느리에게 준다. 다시 말하면 엿 먹으란 것이다. 그 어머니의 딸이 시집가면 시어머니로 부터 썩은 밤을 먹으라고 줄지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의 일이다. 한번은 감기로 기침을 많이 하셨다. 병원 처방약을 드셔도 호전되지 않아 민간요법으로 배를 5분의 1쯤 가로로 자르고 속을 조금 파낸 다음 꿀을 넣고 뚜껑을 닫아 중탕으로 끓였다. 좀 식은 뒤에 그 물을 드시게 하였더니 거짓말처럼 기침이 멎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배가 기침을 멎게 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의보감에 보면 기침 감기 천식 등 질환에 배 즙을 내어 먹으면 낫고 열도 내린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기를 먹고 후식으로 배를 먹으면 배가 바로 천연소화제이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되고 또 몸속에 쌓인 노폐물 특히 중금속을 체외로 배출시킨다니 배가 곧 약이다. 그리고 배는 알칼리 식품이다.
                                                                              

한국은 나라가 작지만 지역별로 나는 특산물이 있다. 보기를 들면 배는 나주, 대추는 보은, 복숭아는 소사, 고추는 청양, 호두는 천안, 능금은 대구. 감은 상주. 굴비는 영광. 밤은 양주, 어리굴젓은 서산, 모시는 한산, 인삼은 금산. 김은 광천 등등이다.

세종신록 지리지에는 토곡물(농산물)목록에 나주배가 들어 있어 나주배의 역사가 우리들과 오랜 기간 함께 했고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고향의 배나무에서 열린 배 맛이 그립다. 지금은 노목(老木)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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