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싹들이 활개를 치기 위해 샘내는 바람과 한동안 부대껴야 하는 햇빛은 또 얼마나 비린내를 풍길 것인가. 본격 사람들이 떠나고 싶다고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기기 한 달 전인 사월, 한여름 더위를 미리 날릴 비책으로 앞선 걸음으로 먼저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미세먼지를 피한다는 핑계로 ‘괌에서 한 달 살아보기’ 여행 이야기도 들리고, 나 또한 오랜만에 안전하고 쾌적한 관광지이며, 신혼여행지로도 선망하는 괌(Guam)으로 4월 8일부터 4월 16일까지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패키지여행도 좋지만 역시 여행은 마음 가는 데로 가보는 것이 진수일 것이다. 한국에서 남동쪽으로 비행기로 4시간 반 걸리는 멀지 않는 위치이지만, 미국령으로 괌 USA라니, 미국처럼 편하게 운전하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공항에서 렌터카를 픽업해서 괌 체류기간 동안 다녔다.

괌은 거제도 크기의 섬이라 괌 일주에 2시간 걸린다고 들었으니, 그냥 한 길을 쭉 가면 시작한 지점에 도달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도착 다음 날, 호텔에서 나와, 들어온 반대 방향인 좌회전을 택하여 한 차선으로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영 사람 사는 길과 멀어지는 느낌으로 길이 한산해졌다. 결국은 큰 문이 있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여권 제시를 요구받았다. 그곳은 괌 해군기지. 무장한 미군이 출입을 제한하였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문을 돌아 나왔을 때, 왜 그렇게 쑥스럽던지. 문을 지키던 군인은 친절했지만, 그쪽도 나도 서로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날 드라이브하면서 지나던 길에 일생 본적 없이 큰 나무를 보았다. 하늘 향해 몽글몽글한 이색적인 이파리들을 가득 달고 부풀어 있던 엄청난 나무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워서 차를 세웠다. 긴가 민가 했는데, 남의 집 마당 겸 주차장 인 듯 했다. 집 앞 툇마루에 열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혼자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나무 가까이 가면서 ‘나무 좀 봐도 되니?’ 하니까 된다고 한다.

그래도 표정의 변화가 없길래, ‘이 나무가 너 어렸을때부터 이렇게 컸니?’ 하고 물으니,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다. 소년의 미소를 보니 안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어른이 나타났으면 했지만 인적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아 서둘러 고맙다고 말하고 얼른 차에 올라 비탈을 경계로 둔 그 집을 빠져나와 다시 달렸다.

매주 수요일 오후 6시에 차모로 빌리지에서 야시장이 열린다. 차모로(Chamorro)란 괌의 원주민을 말하며, 차모로족은 기원전 500년경 라테스톤(Latte Stone)이란 컵 모양의 돌기둥 토대 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스페인 광장 뒤편에 라테스톤공원도 있고, 길을 다니다 보면 라테스톤을 본 따 만든 모형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눈에 띈다.

차모로 야시장에는 많은 상점과 노점들이 부스를 만들어 각종 액세서리, 의류, 장신구, 기념품과 음식물 등을 팔고, 한쪽 아담한 무대에서 전통무용 공연도 한다. 각종 구이 요리가 뿜어내는 자욱한 연기 사이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중앙 건물의 일 층 홀에서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어 차차차 춤을 추며 여흥을 즐긴다. 

매 주말 토요일 일요일 새벽 6시에는 데데도라는 지역명에서 벼룩시장 (Dededo Flea Market)이 열린다. 이곳 역시 옷, 공예품, 과일, 채소, 식물, 즉석조리 간식 등 다양한 상품이 관광객과 현지인을 맞는다. 나는 채소가 뭐 특이한 것이 있나 둘러 보다가, 한국에서 익숙지 않은 선인장 열매를 하나 사서 돌아왔다. 잘라보니 겉보기와는 달리, 과육의 색도 선명하고 신선한 과즙에 맛도 달콤했다. 예쁘게 썰어 사람들과 나눠 먹으니 일찍 시장에 갔다 온 보람도 있고 뿌듯했다.

열대지방이라 그런지 장을 밤이나 새벽에만 여는 것이 특이하다. 시장이라 해서 상권이 치열한 진득한 현지인의 삶의 현장일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이벤트성이거나 소박한 잔치같았다. 그럼 주요 생필품이 유통되는 일반 시장은 어디 있는가? 물어보니 보통 마트에서 장을 본다고 한다.

차모로 전통음식을 맛보기 위해 한산한 평일, 차모로 빌리지를 다시 방문하였다. 주차장이 넓고 간판이 밖에서 잘 보이는 한 전형적인 차모로음식 전문식당에 들어갔다. 큰 텔레비전 화면에서 CNN방송이 나오고 식당 내부는 크지 않았으나, 깨끗하고 짜임새가 있었다. 메뉴의 그림을 보고, 밥과 생선이 있는 요리를 주문했다.

기름 없이 바싹 구운 생선 한 마리와 소담하게 담긴 찰기가 많지 않은 한 주먹 양의 쌀밥과 소량의 카레 색 피클인지 소스가 전부인 일품요리가 나왔다. 간단하고도 맛났다. 귀국 전날 밤 일부러 한 번 더 가서 같은 요리를 주문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국인 아저씨가 친절히 안내 하셨는데, 부인이 한국에서 군 복무 중 만난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안주인이 주방에서 요리를 직접 하셨으니 내 입맛에 맞을 수 밖에 없었나 보다.

괌은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수상과 지상의 액티비티가 있다. 어떤 세대든지 와서 해변에서 힐링을 하든 아웃렛에서 쇼핑을 하든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관광객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다른 여행 때 못 보았던, 두살부터 여섯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한두명과 함께 온 30대 부부가 대세인 듯, 많이 눈에 띄었다. 물론 어르신과 같이 온 가족도 있고 성인도 많이 오고, 세대 별로 알차게 즐길 코스가 많이 준비되어 있다.

숙소 근처 한국인이 하는 마켓에서 포일에 싼 커다란 옥수수 전병 하나를 샀다. 무색 맛의 전분 식량 같은데 먹어보니 고소하다. 이동하면서 남은 부분을 버릴까 하다가, 현지 음식이 이렇게 쉽게 상할 것 같지 않아 짐과 함께 싸서 계속 가지고 다녔다. 나중에 전자레인지에 덥혀 먹으니 역시 상하지 않았고 먹을수록 또 손이 가는 감칠맛이 여전했다. 

남쪽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면서 1521년 3월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 상륙했던 우마탁마을(Umatac Village) 해안에서 정차해 해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오는 외지인 함대를 신기해했을 괌섬의 주민들은 그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새 땅을 발견한 입장과 침략을 당한 쪽 둘 다 지금은 지구촌 현재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때 한국으로 말하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좌에 앉은 중종조(1506~1544) 시대이다.

이 시기 서경덕(1489~1546)은 깊은 사색의 결과, 물질의 힘은 영원하다고 믿으며, 우주와 만물이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했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동짓달 기나긴 밤을’ 같은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차모로족은 그 후 400년 이상 정복당했으며 현재까지 미국령으로 살고 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는데 상륙해서 들어앉은 외세에 대해 차모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괜히 부추기는 것 같아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요즘은 여행하면 관광객보다 원주민의 마음, 그리고 환경보존에 많이 신경이 쓰인다. 

북쪽으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유명한 리티디안(Ritidian Beach) 비치를 두 번이나 놓치고 두 번이나 또 다른 입구의 북쪽의 공군 기지에서 차단 당했다. 그 길은 놓칠 수 없는 한길밖에 없다는 설명을 듣고 갔는데 왜 자꾸 안내판이 안 나오고 군기지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문 앞에는 20대 초로 보이는 미군이 서 있고 나는 또 미안하다고 했다. 그 군인의 얼굴빛은 분홍장미꽃잎처럼 연하고 우아하다. 그는 친절하고 사려 깊어서 내가 놀라지 않게 잘 안내해 주었지만, 나는 이 안락하고 따뜻한 관광의 동선에서 갇힌 물고기의 유영을 느낀다.

기지를 지키는 군인도, 16세기에 스페인사람에게 정복당한 차모로인들도, 그리고 나 같은 관광객도 지금 원하는 것은 평화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도로에 표지판이 미국처럼 많지도 세밀하지도 않았지만, 동네 구석을 들어갈 때마다 미국 동네 느낌이 난다. 지금 이 순간 괌은 평화와 훈풍과 배려와 인심의 지도가 그려져 있지만, 그것을 선용하고 운전해나가는 것은 온전히 나라는 사람의 문제이다.

사는 동안 많은 고마운 것이 펼쳐졌었지만 그간 때때로 남 탓을 한 것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지금 평화가 내 앞에 있다면 이 인생에 대한 감사와 헌신은 오직 내 안의 지도에 집중하면서 시간의 목적지를 찾아가야 하는 것뿐이 남아 있는 모든 길인 듯하다.

조이시애틀뉴스 서울통신원

고려대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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